빛과 어둠은 한 세트

나는 당신에게 밤을 팔았습니다2020. 9. 20. 02:44


   비가 오랫동안 그치지 않던 지난여름 - 이라고 하니 꽤 오래전 일 같다 - 한밤중 달리기 대신 동네 산책을 나선 적이 있다. 빗물에 번진 네온사인이 근사한 요릿집을 지나 감각적인 소품 배치에 신경 쓴 카페로 가던 길, 문득 비 오는 날의 한강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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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가까운 곳에 큰 강이 흐른다는 건 참 멋진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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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생각으로 방향을 틀어 대교 쪽으로 걸었다. 제법 비바람이 세찼지만, 강물은 멀리에서 멀리로 깜깜히 흘렀다. 그렇게 시끄러운 고요 속, 먼 곳에서 형광 재킷을 번쩍이는 사내가 내게로 다급히 뛰어왔다. 대뜸 누군가 뛰어내리는 걸 보지 못했냐는 그에게 현실로도 상상으로도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을 담아 고개를 저었다. 신고를 받고 왔다는 그는 이런 날씨에 여기에 있으면 오해받을 수 있으니 내게 집으로 돌아가길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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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앞으로 이렇게 큰 강이 흐른다는 게 그다지 멋진 일은 아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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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밤 속에서 화려히 빛나는 서울일지라도 한강은 제법 캄캄하다. 그 칠흑 같은 물결을 보고 있자면 나도 몰래 빨려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이런 생각으로 감히 그것에 자신을 맡긴 이들을 조금 이해한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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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작품은 몇 번을 다시 봐도 똑같이 감동하는 효율 좋은 기억력을 가진 나라도 바로 떠오르는 이야기가 몇 가지쯤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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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로우 카드라는 걸 수집하는 소녀의 이야기도 그중 하나로 소녀가 학예회 도중 어둠 속에 갇히는 장면으로 기억은 시작된다. 소녀는 그것에게서 벗어나려 다양한 시도를 하지만 끝없는 칠흑만이 이어질 뿐이었다. 문득 소녀는 어둠 속에서도 자신만은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와 동시에 소녀 안에 숨어 있던 빛의 카드가 나타나 그녀의 자매인 어둠과 함께 봉인되는 것으로 기억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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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억엔 두 개의 인식표를 붙여 두었는데 그곳에 '어둠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자신을 먼저 발견할 것', '빛과 어둠은 한 세트'라고 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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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먼저 발견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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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사유하는 동안에만 존재한다."는 데카르트부터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홍콩 시민들까지 자신의 증명할 어떤 것을 찾는 일은 인류에게 꽤 오래된 숙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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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우린 정말로 어둠 속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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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직 살아있는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나? 내가 존재한다고 확신시켜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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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납치되어 4년간 독방에 감금되었던 어떤 이의 고백은 데카르트의 명제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생각한다고 생각되는 나마저 허상이라면, 그게 장자의 나비였다면 우린 그곳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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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각 차단 실험>이라 불리는 것이 있다. 극도로 감각을 차단한 환경에서 인간의 지각 변화를 관찰한 실험으로 <감각 박탈 실험>이라고도 불린다. 피험자 대다수는 초조함과 시간 착오를 겪다가 감각을 잃고 환영과 환청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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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험자는 "정보의 부재 속에서도 인간의 두뇌는 지속적으로 작동하려고 한다. 그래서 스스로 정보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는 것"이라는 (내게는)다소 의외인 결론을 낸다. 다시 말해, 감각이 차단되어 어떠한 신호도 받지 못하게 된 뇌는 스스로 가상의 자극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뇌는 왜 그런 불필요해 보이는 작업을 수행하는 걸까? 어쩌면 그건 생존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인간은 작동을 멈출 수도 있다는 판단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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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이 실험에서 '환각 상태'를 눈여겨 본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감각 차단 탱크>라는 기구 속에 사람을 태워 체온과 비슷한 소금물 속에서 부유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환경은 참가자에게 초월적인 경험을 제공하고 잠재 능력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몇몇 운동선수나 언론인들은 이러한 방법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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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각의 차단, 환각 그리고 그 너머. 인간이 발견할 그것은 무엇일까? 열반에 들기까지 보리수 아래서 끝없이 명상하던 부처나 자기 죽음 앞에서 묵묵히 기도하던 예수는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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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우림은 어느 인터뷰에서 최근 자신들의 곡 <샤이닝>이 많은 공감을 받는 것 같아 쓸쓸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외로이 홀로 서 있는 각각의 사람들이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나를 받아줄 그곳"을 어서 발견하길 그리하여 나 또한 '빛과 어둠은 한 세트'라는 말을 좀 더 잘 설명할 수 있게 되길 캄캄한 곳에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