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나이트 (The Green Knight, 2021)

필름 코멘트2021. 8. 19. 05:51

   영화 평론가 이동진은 다섯 개의 별을 《그린 나이트》 위에 내려놓으며 이처럼 말했다.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누워도 천장에서 영화가 계속 상영된다."

   이제 막 당구에 빠진 이들이 천장에 당구대를 두고 수많은 경로를 그려보며 잠 못 들듯, 이 영화는 마음을 끌어당겨 끊임없이 복기하게 만든다. 어떤 영화가 볼링의 스트라이크 같이 이야기를 던져서 관객에게 쾌감을 준다면 《그린 나이트》는 관객 스스로가 컨텍스트와 캐치볼 하며 즐거움을 얻는 능동적인 자세를 취하게 한다.

   이 영화를 해석함에 앞서 바탕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1. 이 영화는 브리튼 왕국의 전설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중세 왕국의 전설 즉, '왕'의 전설을 다루고 있다.

   2. 영화는 거대한 두 가지 상징. 운명, 자연 등으로 볼 수 있는 녹색과 자유의지, 욕망 등으로 나타나는 적색. 이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3. 영화사적으로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역사적으로는 브리튼 왕국의 기독교 도입이라는 외적 요인을 작품 내에서 발견할 수 있도록 장치하였다.

   원작 설정에 따르면 기사의 죽음 말고는 원탁의 자리를 변경할 방법은 없다. 즉, 죽음엔 가깝지만 확인되지 않는 모종의 이유로 왕의 옆자리는 오랫동안 공석이었고 이에 따라 그 기사의 죽음 - 아마도 가웨인의 부친 - 이 사실로 판명될 때까지 가웨인은 '아직' 기사가 될 수 없다. 그건 기약 없는 운명으로 가웨인은 그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크리스마스, 왕의 결정과 어머니의 주술로 인해 이 운명의 시간이 빠른 속도로 흐르게 된다.

 

   이때, 가웨인은 '아직' 기사도 되지 못했을뿐더러 기사가 되는 것 이상의 미래는 그려내지 못한다. 그러나 벌써 운명은 가웨인의 생각을 넘어선 곳까지 계획된다. 후대가 없는 왕은 그의 옆자리에 가웨인을 앉히며 그가 자신의 적통임을 상기시키고 마녀인 어머니는 그에 걸맞은 무용담을 만들어 주기 위해 녹색의 기사(이하 녹기사)를 불러들인다. 이것은 가웨인이 선택하지 않은 다시 말해, 계획된 운명이 그려낸 왕의 길이었다. 일 년 후, 녹기사와의 게임을 마무리 지으러 떠날 때도 가웨인은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지만, 왕은 그에게 신의 축복을 어머니는 주술이 담긴 녹색의 띠를 그에게 건네면서 왕의 길로 이끈다.

 

   숲을 빠져나온 가웨인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 강도 소년을 만나 길을 묻게 되는데 바로 그 직전에 나눈 대화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너부러진 시체를 보며 가웨인은 왜 아무도 묻히지 않았는지 소년에게 묻는다. 이에 소년은 묻을 사람조차 없이 다 죽었기 때문이고 이는 어차피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폐허가 된 땅은 초록의 풀 하나 남지 않은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인간은 욕망으로 자연을 다시 말해, 운명을 붉게 물들여 정복한 것 같아도 그것 역시 거대한 운명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무의미한 것일까?

   영화는 강도 소년과 그의 일당에게 모든 것을 뺏긴 채 숲속에 버려진 가웨인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가웨인을 비추던 카메라는 원형 레일을 따라 돌고 그와 함께 시간이 흘러 숲은 초록이 완연한 봄이 된다. 그대로였다면 가웨인은 백골이 되는 녹색의 운명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메라는 다시 시간을 돌려 가웨인을 비추고 떨어진 검을 이용해 묶인 밧줄을 끊어낸다. 이때 가웨인은 칼날에 손을 베어 붉은 피를 흘린다.

   녹색과 적색의 테마는 그 후에 만나는 소녀 위니 프레드와의 대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소녀는 호수에서 자신의 목을 찾아달라는 요구를 하게 되는데 이때 가웨인은 그녀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한다.

   첫째, 정령인가? 인간인가?
   둘째, 목을 찾아 주면 내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정령은 비이성적이고 실체가 없는 마법 같은 일. 즉, 주술로 그를 왕으로 만들려던 어머니의
  인간은 이성적이고 실체가 있는 권력의 일. 즉, 혈통으로 그에게 왕위를 이으려던 왕의 운명을 말한다.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면 그러니까 그들의 운명에 몸을 실으면 무엇을 줄 수 있는지 가웨인은 묻고 있다. 이에 소녀는 그것을 왜 자신에게 묻는지 되묻는데 가웨인은 그에 답하거나 답을 요구하지 않고 호수로 몸을 던진다. 주어진 운명으로부터 무엇도 약속받지 않고 소녀를 돕기 위해 자신의 의지로 호수에 들어간 가웨인의 눈앞에 해골 하나가 보이는데 이때의 호수 빛은 붉은색이다.

   머리를 돌려받은 소녀는 보답으로 그에게 녹기사에 대해 '그의 정체는 가웨인이 아주 잘 아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해준다. 그건 그가 아주 잘 알아야 하는 그러나 '아직' - 기사도 되지 못했기 때문에 - 생각지도 못한 그의 운명이라는 뜻으로 가웨인이 생각하는 왕의 운명이란? 그리하여 그가 생각하는 왕은 무엇인지를 만나러 가는 여정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좀 의아한 장면들이 막간으로 나오는데 서사시에서 영웅의 여정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의 흐름이다. 이게 필요한 이유는 단 하나. 이것이 계획된 운명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운명이 무르익기까지는 (성경에서 자주 쓰이는 '때가 이르매'와 같은 순간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행 중 가웨인은 정신을 잃고 버틸락 성주에 의해 구조된다. 크리스마스를 나흘 앞둔 채 깨어난 가웨인에게 성주는 녹색 성당은 바로 근처이니 며칠간 성에서 쉬어 가기를 권한다. 성에는 성주와 그의 아내 그리고 하얀 안대를 두른 노파가 등장한다. 노파는 가웨인의 어머니가 주술을 할 때의 모습과 유사하므로 그녀(어머니)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성주와 그의 아내는 무엇일까? 성주의 제안과 요구, 성주 아내의 유혹은 마치 운명의 일부인 것처럼 보인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붉은 여우의 그림은 그래서 더욱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녹색에 대한 장설(長舌)에서 그들의 정체를 추측할 수 있는 대사가 있다. 녹색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성주 부인은 이런 말을 한다.

 

    "왜 녹색일까요? 적색도 청색도 아니고."

   녹색은 앞서 봤듯 거대한 자연, 죽음과 삶, 운명적색은 그에 대항하는 인간의 선택, 자유의지, 욕망을 말한다. 그렇다면 청색은 갑자기 왜 나왔을까? 단순한 나열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중세에서 청색은 귀한 색으로 성모 마리아의 옷 등을 그릴 때 사용되었다. 그리고 성주 아내가 성내에서 입고 다니는 옷은 짙은 푸른빛의 드레스다. 즉, 그들은 성모와 성부. 즉, 신이다. 그들을 기독교의 신으로 추측할 수 있는 장면은 또 찾을 수 있다.

 

   성주 아내는 자신이 만들었다는 초록 띠를 보여주며 그를 유혹하고 가웨인은 그에 넘어가 사정(射精)하고 만다. 이때 성주 아내는 그에게 '당신은 기사가 아니다.'는 말을 하는데 거꾸로 생각하면 '너는 이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말과 같다. 이건 선악과와 아담의 모티프를 차용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가웨인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급히 성을 빠져나오는 모습이 에덴동산을 떠나는 아담과 겹쳐 보이는 지점에서 또 확인할 수 있다.

 

   이 장면 바로 직전, 노파가 가웨인의 뺨을 어루만지고 자신의 가슴 위로 손을 올리는데 '노파 = 어머니 = 마법 = 브리튼 왕국의 구교'라는 점에서 이건 국교의 교체로 해석할 수 있다. 최초엔 그의 운명을 지켜줄 녹색 띠를 어머니가 전해주지만, 이후엔 성주의 아내로부터 얻게 된다는 설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장면은 비록 사랑하는 아들(혹은 왕권)을 더는 자신의 힘으로 지켜줄 순 없지만 어떠한 방식(국교의 교체)으로든 생명(혹은 왕권)을 담보 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는 것을 표현한 연출이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완성하는 것이 바로 성에서 빠져나온 가웨인을 불러세우는 성주의 목소리다. 마치 에덴동산을 빠져나온 아담을 찾는 신의 목소리처럼 가웨인을 불러세운 성주는 조건에 따라 성에서 얻은 것과 사냥감을 교환할 것을 요구한다. 아담이 그랬듯 가웨인은 변명을 해보지만, 그가 성주 아내로부터 얻은 쾌락을 성주는 입맞춤으로 받아간다. 천지창조처럼 보이는 이 장면 뒤로 가웨인은 이제 그만 '우리'를 보내 달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가웨인이 성에서 얻은 녹색 띠와 자신을 말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굳이 인칭대명사를 쓴 것에는 분명한 이유 즉, 아담이 떠날 때 이브와 함께였다는 걸 내포하고 있다. 조건을 모두 충족하지 못했음에도 성주는 떠나는 가웨인에게 덫에 걸렸던 거라며 여우를 넘겨준다. 붉은여우를 쫓던 사냥꾼이 붉은 망토를 한 기사를 쫓는 그림으로 전환되었던 것으로 보아 성에서의 모든 일은 가웨인에게 주어진 신의 시험이었으며 그것을 완벽하게 수행하지 못하였음에도 붉은여우를 풀어준 것은 죄를 지어 에덴을 떠나는 아담에게 신이 사자의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어준 구약의 이야기로 치환되면서 완성된다.

 

   이제 남은 것은 녹기사뿐이다. 잠들어 있는 기사 앞에 도끼를 내려두고 가웨인은 오랫동안 그를 마주한다. 가웨인의 운명은 왕이 되는 것이다. 지금 눈앞의 죽음을 피한다 해도 운명은 그에게 매여(초록 띠) 그를 왕으로 만든다. 그것은 애초에 계획된 운명. 숲에 홀로 남겨져 백골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왕. 그저 쓸쓸히 운명 속에서 사라지는 그저 그런 존재. 그런 임사체험 끝에 가웨인은 운명을 풀어내고 지금 여기에서 죽음을 선택한다.

 

    《그린 나이트》가 결국 왕의 이야기라고 본다면 여기서 그는 예수의 죽음을 모사한다. 예수 스스로 선택한 붉은 피가 땅을 적시고 인류를 구원한 것처럼 가웨인 스스로의 선택은 브리튼 왕국을 넘어 대영제국까지 이어지는 번영을 위한 왕의 자기희생(Sacrifice)이 된 것이다. 엔딩 크레딧 이후 아주 어린 여자아이가 브리튼 왕가의 왕관을 뒤집어쓰는 (아마도 영국 여왕을 은유하는) 쿠키가 이를 확인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