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탄적일천 (海灘的一天, 1983)

필름 코멘트2022. 1. 11. 01:43

  '해변에서의 그날'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이 영화는 아시다시피 '에드워드 양' 감독의 장편 데뷔작입니다. 2007년 타계한 그는 대만 영화계의 ‘신랑차오’(新浪潮, 신낭조), 즉 '뉴 웨이브'를 이끈 사람 중 하나죠. 복잡한 판권 문제로 상영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번에 '해탄적일천'을 영화관에서 만날 수 있는 건 행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주제 면으로 보면 이 영화는 '자리'라는 인물이 어떻게 주체적인 삶을 살 게 됐는지 그게 행복과 어떤 관련 있는지를 얘기합니다. 멀어지는 '자리'의 뒷모습을 보며 "그 소녀가 자라 완벽한 여인이 됐다. 그 성장은 오롯이 해변에서 시작됐다."는 '웨이칭'의 마지막 내레이션이야말로 긴 러닝 타임 동안 이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겠죠. 서사 역시 가부장적 아버지, 소극적이지만 가장의 책임을 우선시하는 장자, 모든 것을 감내하는 전형적인 어머니, 그리고 새로운 선택을 하는 딸의 모습이라는 통속극의 전형적인 모습이구요.

 

  이 영화의 대단한 점은 영상 미학과 구조를 통해 이처럼 뻔한 이야기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영화는 모든 장면을 포스터로 사용해도 될 만큼 아름다운 건 물론이고 미장센을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하죠.

   정략결혼에 대한 '자썬'과 아버지의 대화 장면을 예로 들어 봅시다. 방 안, 마주 앉은 부자, '자썬'이 이런 결혼은 어렵다고 이야기한 후 장면은 전환 되어 어머니와 '자리'가 그곳을 벗어나 산책하러 나갑니다. 산책 이후 다시 방안. 깨진 찻잔, 무릎을 꿇고 있는 자썬', 그걸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 어머니는 말없이 찻잔을 치우고 '자리'는 방 밖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정략결혼에 반대했던 '자썬'의 실패로 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가정 내 아버지의 권위, 소극적인 '자썬'과 감내하는 어머니의 성격 그리고 그걸 지켜보면서 아무런 선택도 하지 못하는 '자리'를 보여주기도 하는 장면이죠.

 

  또 한편으로는 해변의 유리병, '자리'의 의부증에 대한 서사 구조를 의도적으로 섞어 놓음으로 극 내의 긴장감과 해소를 효과적으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영상 미학과 영화 구조에 대한 '에드워드 양' 감독의 이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죠.

 

  물론 영화 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들도 있습니다. 예컨대, '자리'가 '청더웨이'와 처음 만난 식당에서 들고 있던 2권의 책 중 하나는 '엘리자베스 고지'(Elizabeth Goudge)의 'The Child from the Sea'입니다. '바다'라는 장소도 그렇지만 책 또한 상실감과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와 어떤 관계가 있어 보이죠.

   또 영화가 만들어진 80년대 대만은 검열이 다소 완화되었다고는 하나 완전히 자유로운 창작을 할 수 있던 분위기는 아니었죠. 이와 같은 사회상과 함께 영화 속 '자리'와 그녀의 친구 '신신'의 대학 시험 주제가 '검열'(censorship)이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겠습니다.

 

  이 외에도 중간중간 흐르는 베토벤과 쇼팽의 클래식,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 거기에 앞서 봤던 영미문학까지 오랜 유학 생활을 했던 '에드워드 양'에게 끼친 문화적 영향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죠.

 

  영화가 끝나고 '웨이칭'의 마지막 내래이션을 여러 번 되뇌어봤습니다. 바다에서는 시작됐다는 성장은 뭘까? 그건 아마도 관계에 의해 혹은 거기에 의지해서 삶을 결정해왔던 그녀가 처음으로 본인만을 위한 결정을 했던 순간이 그 바다였던 거겠죠. '웨이칭'이 보호색을 띠고 위선적으로 행동했던 그 날처럼요.